규범이와 규민이의 첫 번째 제주도 여행
94년에 신혼여행으로 제주도를 다녀오면서 스쳐지나가듯 지나간 여러 풍경들의 아쉬움을 나중에 여유있게 다시 한번 와보자고 했던 결심을 그로부터 일곱 해를 보내고 나서야 이루게 되었다.
이제 여섯 살이 된 규범이와 갓 돌을 넘기고 두 살이 된 규민이에게는 생애 첫 번째의 제주도 여행과 더불어 짦지만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 기회가 되었고, 규민이는 생애 처음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르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우리 가족 네명의 첫 번째 제주도 여행......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마음은 일곱 해 전의 그때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즐거웠고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가득한 여행이었기에 마음만으로는 최소한 일년에 한번은 제주도를 찾고 싶지만 꼬마 둘이 포함된 우리 가족 네 명이 한번 다녀오는데 최소한 백만원 이상 소요되는 경비는 그런 마음을 흔들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첫째날 : 가는 데 하루나 걸리고
우리가 출발을 해야되는 울산공항에서는 제주도행 항공편이 하루에 단 한 편.
그것도 오후 4시 20분 발이라서 3박4일의 일정 중 하루는 고스란히 잠 자러 가는데 소요하는 셈이 된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예약해둔 대한통운 렌트카의 대기 장소인 공항 3번 주차장에서 렌트카로 짐을 옮겨 실었다. 화력발전소의 자재 운송을 담당했었다는 대한통운의 직원이 내 주소를 보고 친밀감을 표시한다. 나 또한 대한통운과는 회사일로 맺은 깊은 친밀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드디어 하얀색의 렌트카로 짐을 실고 성산 일출봉으로 향하는 동부해안도로로 방향을 잡았다.
성수기가 아닌 탓에 한산한 동부해안도로를 타고 주변 경관을 둘러보면서 느린 속도로 가자니 성산포까지 거의 1시간 30분은 족히 걸린 것 같았다. 보통 속도로 달려가면 40분 정도면 도착할 거리 정도밖에 안되는 거리에 있는 성산포를 느린 속도로 도착하니 해가 저물어가는 7시 정도가 되었다.
예약은 하지 않았지만 당초에 숙박지로 생각했던 성산포의 호텔은 생각보다는 낡아보였다. 그래서 즉석에서 다른 곳을 찾아보기로 작정하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지은지 얼마되지 않아보이는 <보물섬>이라는 이름의 콘도형민박으로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숙소 옆의 흑돼지 전문점으로 보이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서 첫날 하루의 일정을 접었다.
둘째날 : 성산일출봉
성상포의 콘도형민박집인 <보물섬>에서 하루 저녁을 보낸 아침.
성산 일출봉이 코앞에 바라 보이는 <해뜨는 식당>에서 전복죽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 중이다. 멀리 일출봉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초원이 보이고 소 몇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풍경이 보기좋아 성산봉으로 올라가고픈 마음이 간절했지만 우도를 둘러보는 일정을 우선하기로 결정을 했다.
아직까지는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든 규민이를 데리고 봉우리 길을 오른다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았던 탓도 있다. 우도를 돌아보고서 일출봉 중턱까지라도 가볼 수 있는 시간이라도 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도행 도선이 출발하는 부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둘째날 : 우도의 초원
예전에 매물도를 찾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게 가슴이 탁 트이는 설레임의 첫인상을 안겨주었던 우도의 넒은 초원에는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우도(牛島)라는 이름은 바다위에 물소가 머리를 내민 모양처럼 누워있는 섬의 생김새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풀밭에 이리저리 노니는 소들의 모습은 우도를 찾은 우리들에게는 마스코트처럼 다가왔다.
초원의 주변으로 나있는 산책로를 한 바퀴 돌면 우도 팔경의 하나인 지두청사(地頭靑莎)를 맛볼 수 있는 우동봉 132m의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우도에서 가장 넓은 초원인 이 곳이다.
겁이 많은 규범이는 줄이 매어져 있는 소옆으로는 가보지도 못하고 멀찌감치서 사진을 찍을 자세를 취한다.
그래도 '소와 함께 찍어주세요.' 라는 말은 잊지를 않았다.
둘째날 : 우도의 서빈백사
우도에는 여덟 가지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이름하여 우도팔경(牛島八景)....
(1) 주간명월(晝間明月) : 우도의 남쪽에 '광대코지'라는 기이한 암벽 및으로 파도에 의해 생긴 해식동굴이 있는데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에 푸른 빛깔의 투명한 바다 위로 햇살이 비추어지면 동굴안에 하얗고 둥근 보름달 모양이 서서히 떠오르는 환영이 생기는 데 이것을 주간 명월이라고 한다.
(2) 야항어범(夜航漁帆) : 우도의 어느 곳에서나 한밤에는 어선들이 불을 켜놓고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멸치잡이 시기에는 수많은 어선들이 형형색색의 불을 밝히고 불꽃놀이 축제처럼 화려하고 특히 둥근 보름달이 함께 어우러지면 우도 야경의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야항어범이라 한다.
(3) 천진관산(天津觀山) : 천진리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는 풍경이 더없이 아름답다고 한다. 맑은 날에는 한라산이 절경이 우도 앞의 푸른 바다와 어울려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고 하는데 이를 천진관산이라 한다.
(4) 지두청사(地頭靑莎) : 우도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우도봉에서 바라보는 우도의 전경을 지두청사라 한다. 황홀한 초록빛과 푸른 바다로 빨려들 듯한 경치, 그리고 소와 염소들이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는 정경과 훈훈한 바람의 맛에 도취되는 아름다운 광경을 느낄 수 있다.
(5) 전포망도(前浦望島) : 우도의 앞쪽 바다에서 바라보는 섬의 전경. 우도가 보이는 종달리의 앞바다에서 보면 섬의 모습이 물위에 소가 누워있는 듯한 아름답고 평화로운 형태를 보인다.
(6) 후해석벽(後海石壁) : 배를 타고 우도봉 부근으로 돌아들면 아래의 절벽이 온통 줄무늬 바위로 형성된 석벽을 이루고 있다. 그 모습이 거대한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을 띠고 있다.
(7) 동안경굴(東岸鯨窟) : 우도봉 뒤쪽 아래에 검은 모래가 있는 검멀레 해안이 있는데 이 해안에 콧구멍처럼 생긴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이 바로 동안경굴이다. 굴은 썰물 때에야 모습을 보이는데 '동쪽 언덕의 고래가 살 만한 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으로 예전에 고래가 살았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추측이 남아 있는 곳이다.
(8) 서빈백사(西濱白沙) : 우도의 서편에는 산호가 부서져 형성된 하얀 모래 사장의 해수욕장이 있다. 산호사의 빛깔은 눈이 부셔서 햇살이 밝은 날에는 눈이 부셔서 이 곳에 오래 있다 오면 눈이 얼얼할 정도이다. 바다 밑바닥이 다 들여다보이는 맑은 바다의 비밀이 바로 이 흰 산호사에 있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동양에서는 단 한 곳밖에 없는 산호관광지라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
셋째날 : 서귀포의 이색숙소 '청재설헌'(淸齎褻軒)
초원에서 시작해서 서빈백사에서 끝을 낸 우도의 일주를 마치고 다시 도선을 타고 나와 서귀포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오는 길에 신영영화박물관에 들러 긴 시간을 영화 속의 풍경에 빠졌다가 성읍민속마을을 거쳐서 두 번째 숙소로 정해놓은 청재설헌을 찾은 시각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청재설헌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음날 주인 아주머니가 차려주신, 제주도의 음식이 가득 담겨진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고 잠시 쉬는 중....
청재설헌의 앞마당
전날 저녁, 주위에 인가가 안보이는 청재설헌은 불빛이 없어 길도 잘 안보이던 어린 시절의 시골마을을 연상케 했는데 아침에 밝은 모습으로 드러난 건물과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객실은 고급호텔을 무색하게 했다.
세련된 감각이 아니고서는 선택을 하지 않는 노출컨크리트조로 지어진 청재설헌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어느 감각있는 건축가에 의해서 설계가 된 듯 아름다운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청재설헌에서 관리하는 넒은 비닐하우스들과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은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집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우리 가족들의 관광 취향에 맞아서 오전 나절은 이곳에서 거의 보냈다.
청재설헌의 한쪽에는 [다비치 리]라는 자그마한 갤러리가 있어서 더 이색적이었다. 마당에는 이층의 정원에는 자그마한 연못도 있다. 언젠가 다시 한번 찾고 싶은 마음을 안고 떠나온 이 집에서 이번 제주도 여행의 즐거움은 한껏 배가되었다.
청재설헌 마당의 샤프란
둘째날에 들른 성읍민속마을의 어느 집 마당 한구석에서 본 적이 있었던 지극히 단정한 모습의 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었는데 이 꽃들을 다시 청재설헌의 마당에서 발견하고 찍어둔 사진이다.
성읍민속마을에서 꽃이름을 물어보니 그저 '마늘꽃'이라고들 부른다는 이야기만 듣고 나중에 돌아와서 청재설헌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이름만 많이 들어본 '샤프란'이라는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이름만 들어본 '샤프란'은 내가 좋아하는 꽃 중의 하나가 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다시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게는 제주도의 기억을 간직한 꽃이 될 것 같다.
세쨋날 : 마라도
청재설헌을 나서서 제주도의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제서야 우리나라의 최남단 마라도를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신홍여행을 왔을 때의 기억이 선명한 산방산을 멀리 바라보며 마라도행 선착장이 있는 송악산으로 향했다. 뱃시간이 남아서 송악산 전망대를 한 바퀴 돌고 맑고 푸르른 바닷물이 낭떠러지 아래로 보이는 그 곳에서 옛날 일제시대 때의 군용기지로 쓰였던 흔적들을 보고 마라도행 유람선에 올랐다.
공포의 시작이었다.
맑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운이 없었던 그날은 내가 태어나서 배를 타본 이래로 가장 최악의 항해를 했던 날이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막상 배를 타니까 파도가 세서 배가 유난히 요동을 쳤고 날도 더워서 유모차에 앉아있는 규민이의 모습도 유난히 불안스러워 보이더니 결국 우유 먹은 걸 제 옷에 다토하고서 창백한 얼굴이 된다. 차에 짐을 두고 여분의 옷을 준비하지 않았던 탓에 결국 규민이는 젖은 상의는 벗고서 다녀야 했다.
마라도에 도착하고서는 네명 다 녹초가 되어서 한동안을 의자에 앉아서 쉬다가 겨우 몸을 추스려 마라도 분교 앞에 앉았다. 사진 속에 보이는 규민이의 얼굴은 아직까지 배멀미에서 회복이 되지 않은 모습이다.
결국 마라도의 그 유명한 '해물자장면'을 맛보리라던 계획은 무산이 되었다. 물만 먹어도 토악질을 할 것같은 느글느글한 기분으로 다시 돌아가는 배를 타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공포, 그 자체였다.
돌아오는 배에서는 제발 괜찮아야지 하는 바램을 가지고 올라탔건만, 돌아오는 배는 결국 한 쪽 엔진이 고장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파도는 아까보다 더 심해진 것 같고 바닷물이 배로 연신 밀려 들어오는 걸 보고 급기야는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만약에 배가 가라앉으면 수영도 못하는 내가 이 세식구를 어떻게 해야 할가....
예정시간보다 30분은 더 걸려서 배는 결국 다시 돌아왔고, 짦은 시간이었지만 기인 악몽에 빠졌던 찜찜한 느낌을 안고서 렌트카에 올라탔다. 나는 마라도로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지만 다른 가족들은 아무도 마라도행 유람선을 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넷째날 : 그린리조트 앞에서
세 번째 숙소로 정해놓은 제주도 동쪽 방향의 그린리조트에서 하루를 자고 난 아침에 그린리조트의 뒤쪽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다. 뒤쪽 풀숲에서 멀리 보이는 제주도의 오름들을 보면서 풍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신천지미술관
유난히도 날이 맑았던 마지막 날의 신천지미술관에서 규범이는 제 키보다 훨씬 큰 10원짜리 동전 조각을 잡고서 즐거원한다.
멋모르는 규민이는 심각한 표정의 두상 조각 아래서 저도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렇게 제주도 여행의 아쉬운 마지막 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엄마 아빠의 취향 때문에 우리 가족은 여행 중에 미술관 같은 곳만 찾아다닌다. 놀이동산 같은 데를 더 자주 갔으면 하는 규범이는 좀 불만스럽지만 어쩔 수가 없다.그래도 동물 모형의 재미있는 조각들이 두 아이를 즐겁게 해주었다.
신혼여행 때 가본 제주조각공원과는 달리 여러 가지 미술품과 함께 정원에도 조각들이 많이 있어서 마지막날을 즐겁게 해주었던 곳이다.
신혼여행 때 제주도에서 돌하루방의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을 듣고 재미삼아 코를 마져댄 것 때문에 남자 아이만 둘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 돌하루방 조각들...
이제 그 아이들이 키 순서대로 있는 돌하루방 사이에서 제 키만한 돌하루방을 찾아서 자리를 잡은 모습을 보면서 신혼여행 이후 7년간의 세월 흐름을 느껴 본다.
넷째날 : 탐라목석원
제주 시내에서 가까운 탐라목석원에는 돌과 나무로 어우러진 제주도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곳이다. 제주도의 날씨는 지역마다 달라서 신천지미술관에서는 그렇게도 맑던 하늘이 탐라목석원을 찾아 한라산의 산 어귀를 돌면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탐라목석원 주변에는 다시 맑은 날씨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찾아간 탐라목석원에는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돌하루방 다음으로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조각상인 '동자석'의 재미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너무 흔한 이미지가 되어 버린 돌하루방 외에 제주도에서 만나는 돌조각들은 참 재미있는 모습들을 하고 있다. 사실, 제주도는 돌조각만 찾아다녀도 여행 일정이 빠듯할 정도로 무궁무진한 모습의 돌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동자석 앞에 자리잡은 규범이의 밝은 모습처럼 즐거웠던 3박4일간의 제주도 여행은 탐라목석원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어야 했다. 제주공항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쉬움과 집으로 돌아가는 반가움이 함께 교차되었었지만 아쉬운대로 제주도의 맛을 이번에는 조금은 느끼지 않았나 하는 만족감으로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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